Posts

[쓰담쓰談 03] NO WHERE, NOW HERE

Image
1950년대의 일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포르투갈로 떠나는 포도주 운반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선원이 출항 준비 점검을 위해 냉동 선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원이 냉동실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냉동실에 갇힌 선원은 죽기를 다해 고함을 지르고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배는 출항해 며칠 후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선원들이 냉동 선실 문을 열었을 때 그 선원은 죽어 있었습니다. 동료 선원들은 냉동실벽에 빼곡히 쓰인 글에서 그가 죽은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얼어 죽은 것입니다. 그는 얼어 죽으며 느끼는 감정을 냉동실벽에 그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냉동실은 작동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냉동실안 온도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섭씨 19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원을 죽게 한 것은 차가운 냉동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상상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과 삶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바로 절망이라 이야기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나약한 인간이 죄로 인해 절망하게 된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지만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걱정입니다.   성서에는 “마음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걱정을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걱정입니다. 있으면 있어서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걱정입니다. 해가 떠오르면 우산장사하는 둘째 아들이 걱정이고, 비가 오면 짚신 장사하는 맏아들 때문에 걱정합니다. 해가 떠오르면 짚신 장사하는 맏아들이 장사가 잘되고, 비가 오면 우산장수하는 둘째아들이 돈벌이가 좋을 텐데 말입니다. 문제는 어느 쪽을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조건 속에서도 만족을 발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

[쓰담쓰談 02] 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보내주시오

Image
아버지는 늘 걱정이 많았습니다. 개구쟁이 짓이 한창인 아들은 늘 다치고 깨지고, 게다가 옷이며 운동화는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헤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구멍 난 아들의 운동화를 발견한 가난한 아버지는 고장 난 세탁기를 새로 구매할 돈을 절약해 아들의 운동화를 사기로 했습니다. 마침 마을에 있는 부잣집에서 세탁기를 중고로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와 찾아갔습니다. 멋진 대문 안으로 장미가 늘어진 아름다운 정원과 잘 지어진 저택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집에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초인종을 누르자 주인 부부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세탁기를 사기 위해 흥정을 시작한 아버지는 아들의 운동화를 함께 사기 위해 가격을 조금이라도 더 깎을 요량으로 중고 세탁기를 사게 된 사연도 늘어놨습니다. “저는 아들 녀석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언덕길에서 뛰어다니며 미끄럼을 타질 않나. 진흙탕에서 뒹굴질 않나, 산이며 들이며 뛰고 노느라 신발이며 옷이며 남아나질 않아요.” 옆에서 가만히 이 말을 듣던 부인은 얼굴색이 변하더니 마침내 울음을 참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서 있는 아버지에게 곁에 있던 집주인이 말했습니다. “저희 딸은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걸은 적이 없습니다. 딸아이가 걸을 수만 있다면 신발을 수십 켤레를 닳게 해도 좋겠다는 생각에 저러는 것이니 난처해 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남들이 원하고 바라는 많은 것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잊고 늘 자진의 처지를 비관하며 신세타령만 하며 사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만사가 부정적이고 우울한 사람, 늘 자기의 삶을 타인의 삶과 비교하고 자신의 주변을 비관하는 사람 말입니다. 엄마가 이런 경우 아이들에게 “너는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해서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난치병 아이를 둔 어떤 엄마들은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우리 아이가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이 이런 경우 남편의 잔소리와...

[쓰담쓰談 01] 빙탄상애, 얼음과 숯이 서로 사랑한다?

Image
빙탄상애(氷炭相愛): 얼음은 숯불에 녹아서 물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숯불은 얼음 때문에 꺼져서 다 타지 않고 숯으로 그냥 남으므로 서로 사랑을 지키고 보존 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다시 말해 숯은 재가 되지 않게 하고 얼음은 따뜻함으로 녹여 본래의 물이 되도록 돕는 사랑이다. 얼음과 숯불이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뜻을 가진 빙탄불가이상병혜(氷炭不可以相竝兮)라는 고시가 있습니다. 이는 얼음과 숯불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용납될 수 없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친구 사이에 우정과 배신이 함께 할 수 없고, 왕과 신하 사이에 간언과 아첨이 함께 할 수 없고, 부부 사이에 사랑과 증오가 함께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후에 이 시구에서 빙탄상애(氷炭相愛)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문자적으로 얼음과 숯불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얼음과 숯의 본질이 서로 달라서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실제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이르는 가슴 먹먹한 말입니다. 설령 그런 사랑이 있다 하여도 이루어져서도 안 되고 도저히 이루어질 수도 없는 참으로 아픈 사랑입니다.   문학에서는 몬테규가와 캐플릿가의 칼부림 속에서도 싹튼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바로 빙탄상애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그러한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과 살육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빙탄상애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모두를 파경에 치닫게 하는 빙탄상해(氷炭相害)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종교도 정치도 아닌 평범한 우리의 사랑 이야기로 돌아와 봅니다. 나이와 국경, 이념과 종교, 신분과 장애를 뛰어넘어야 하는 '빙탄상애'가 아닌, 살다보니 심장이 얼어버리고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우리 이야기 말입니다. 영원히 하나가 되겠다고 맹세한 결혼서약을 파국으로 끝나게 하는 차가운 분노(氷)와 불같은 불신(炭)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 친구와 이웃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